옛날 어떤 사람이 검은 말을 타고 전쟁터로 나아갔다.
그러나 적이 두려워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그래서 얼굴에 피를 바르고 거짓으로 죽은 것처럼 꾸며 죽은 사람들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탔던 말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군사들이 모두 떠나자, 그도 흰 말꼬리를 베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옆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탔던 말은 지금 어디에 있기에 걸어오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내 말은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지고 왔다."
옆 사람이 말하였다.
"네 말은 본래 검은 말인데 왜 흰 꼬리인가?"
그는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세상 사람들도 그와 같다.
스스로 인자한 마음을 잘 닦아 행하므로 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을 살해하고 온갖 고통을 주면서 망령되이 착하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말이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 백유경(百喩經) -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보다 참말을 하는 것이 쉽습니다.
참말을 억지로 하는 것 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선의든 악의든 아니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만 하려고 애쓰는 것 보다 항상 자신의 말을 관(觀)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쉽고 좋은 방법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서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 사상과도 맞는 일입니다.
중도(中道)란 사성제,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 깨달음 통해 이쪽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니 굳이 어려울 필요도, 또 너무 쉬워서 게을러질 일도 없습니다.
‘나는 거짓을 범하지 않았다‘는 행위의 결과 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어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만일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면 신은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는 제어장치나 아니면 아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은 무의식적으로 하기 힘듭니다.
너무 거짓말하는 것이 일상화 된 사람은 거짓이 무의식에 잠겨있어 그럴 지도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거짓말을 하는 자는 그것이 거짓인지 자신이 제일 먼저 알면서 이야기를 짜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을 눈 멀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큰 업(業)을 짓게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거짓말 그 자체는 어쩌면 아무런 힘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단지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획하고 꾸미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의 맑은 본성은 어두워져 어리석은 감정의 힘이 스스로를 힘들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속였다면 그 행위는 자신의 본성인 밝은 에너지를 무명(無明)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반복된다면 우리 자성(自性)의 밝음은 어리석음의 그림자에서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적 특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용기를 갖고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만천하에 표현하며 자신의 실수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잘못의 참회를 구하는 일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동안 본성을 어둡게 했던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깊은 곳 까지 벗어던지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 크기에 관계없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자신의 본성(本性)을 가리는 어둠의 크기는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거짓말이나 사소한 잘못도 그때그때 참회하고 자신을 밝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광명(하늘, 하느님, 비로자나, 아미타, 석가모니불 등)의 존재에서 비롯됐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얼굴이 밝은지 어두운지를 먼저 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으면 “요즘 얼굴이 밝아 보인다.” 이런 덕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밝음’은 우리의 본성이며 행복이고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가 서방정토에 십만억 불토를 지나면 있고, 그 세계야말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 찬 세계라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예토)은 별 의미가 없고 온통 고통으로 가득하니 빨리 저 극락세계(정토)로 가자고하는 회피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화법에 있어서 반대 급부적인 곳을 강조하여 지금 이 현실에 집중하고 충실하여 이 순간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할! 이며 역설적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구요. 또한 아함경에 어둠이 깊이면 사벽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예토(穢土)와 정토(淨土)는 극과 극입니다. 예토가 고통스럽고 더러울수록 정토가 가깝다는 말이 되고 정토의 세계가 나와는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점점 내 가까이 존재한다는 직감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죽으면 사후에 정말 정토에 가는지, 아니면 저승세계가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깊게 논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왜냐면 생각의 주체는 저승세계에 있는 귀신이 아닌 이승세계의 우리 자신이며 인식의 시점은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이 현실조차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미혹한 존재들이기에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그 불가지 세계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의 차원에서 다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세계는 범부가 말한 것이 아니라 성현들의 말씀하시니 우리는 그 세계를 보여줘도 볼 수 있는 눈의 기능이 없고 들려줘도 제대로 들을 귀의 기능이 없기에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지금 이 현실을 어떻게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느냐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만일 살아있는 이 세상 보다 죽어서 저 극락세계로 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면 부처님이나 성인 들은 아마도 빨리 죽는 법을 중생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이 생(生)의 삶을 잘 영위하는 방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생(生)의 성공 여부가 다음 생(生)의 원인이 되는 것이니 결국 우리가 이 생(生)에 충실하여 차생(次生)의 극락세계에 비교하여 뒤짐이 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다음 생의 행복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생을 조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생(生)을 잘 영위하는, 즉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직 오지도 않은 보다 나은 다음 생을 위해 지금의 생을 무시하고 다음 생에 집착한다는 것은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다리는 무척 어리석은 농부와도 같은 것입니다.
금생의 삶을 잘 영위한다는 것은 밝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광명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계발시키는 일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돼야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외롭지 않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어둡게 하느냐 밝게 하느냐가 더 큰 문제입니다.
또 다른 거짓말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말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넘쳐 흐르는 사랑이 있었지요.
어느 날 그런 그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지요.
그렇게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남편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남편은 이웃에게 인삼 한 뿌리를 구해 그것을 산삼이라고
꿈을 꾸어 산삼을 구했다고 아내에게 건네주었지요.
남편은 말없이 잔뿌리까지 꼭꼭 다 먹는 아내를 보고
자신의 거짓말까지도 철석같이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삼을 먹은 아내의 병세는 놀랍게도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미소를 띄우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는 인삼도 산삼도 먹지 않았어요.
당신의 사랑만 먹었을 뿐이에요.
세상에는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이 있습니다.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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