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의 효와 양구체의 효
효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다.
孝를 말하자면 성인 공자를 빼 놓을 수 없다.
그가 인류에게 효에 대한 문을 개방했기에 그렇다. 고서를 들추다 보면 효의 효시는 2세 단군 부루 라는 기록이 있다. 그 분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복을 입어라는 법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역사에는 인멸해 버리고 다만 공자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 오니 안타까운 일이나 공자 성인께서 부루 단군을 인정해 주신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중의 하나이다.
과거 부루 단군께서 이 법을 내기 이전에는 3-5개월 脫喪탈상이던 것을 3년 상으로 정했으며 공자께서 이 법이 지극히 옳다고 본을 땄으며 말씀하시기를
“효도할 줄 아는 지아비는 사랑하고 세상을 유익하게 한다.”라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명문가에서 회자되고 있는 ‘孝爲百行之本’은 영원불멸의 명언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공자의 정신은 제자 증자에 의하여 더욱 돋보이게 된다.
소위 효경이 그것으로, 효경의 중심이 되는 말은 ‘身體髮膚는 受之父母요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라.’ 는 내용으로 증자는 평생 동안 이 말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 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증자가 죽음이 임박해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曾子有疾, 召問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대략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해 보면 위에 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를 실천했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증자가 죽을병이 들어 침상에 누워서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불을 들추고 내 발과 손을 보아라. 시경에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조심하라.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엷은 얼음을 밟듯이’ 살아왔는데 죽음에 이르러서 이제야 나는 부모님께서 주신 몸을 상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겠다. 제자들아.
다시 말하면 증자는 몸과 터럭까지 다 부모님께서 주셨으니 훼손하지 말고 상하지 말고 온전하게 지켜서 사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말한 것이다. 그런 효를 일생 동안 잘 지켜서 임종의 자리에 와서 보니 이제야 불효를 하지 않았기에 해방감이 든다는 말인 성싶다.
이런 증자가 아버지 증석을 봉양할 때 매 끼니마다 술과 고기를 드렸다. 그런데 혹 남기신 일이 있으면 증자가 아버지께
“이 남은 고기와 술을 누구를 줄까요?” 라고 물으면 아버지 증석은
“그래 아무 개를 주어라. 혹은 너희가 먹어라.” 라고 말하며 즐거워 하셨다.
그리고 혹 친구가 찾아와서 술과 고기가 더 필요하면
“아들아! 술과 고기가 더 있더냐?” 물으면 증자는 곧 바로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가져와 아버지 증석을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데 아버지 증석이 죽고 증자가 늙어 아들 증원의 봉양을 받는데 증원은 같은 효도를 드리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증원은 자로 재듯이 증자에게 봉양했다.
다시 말하면 고기와 술을 매 끼니마다 올리면서도 남은 음식을 누구를 줄 것인가 묻지 않고 증원 스스로 결정했다. 그리고 혹 아버지의 친구가 오셔서 술과 고기를 더 있느냐? 물으면 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왜냐하면 다음 끼니 때 드릴 고기와 술을 축내지 않으려고 자로 재듯이 규격에 맞추는 효도를 드렸던 것이다.
같은 효도이지만 증자가 아버지 증석에게 드린 효를 養志의 孝라하고 아들 증원이 증자에게 드린 효를 養口體의 孝라한다.
아무튼 증자의 효을 일러 出天之孝라 하니 어떻게 효도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여러분께서 이미 판단했을 것이다.
양지의 효도에 대한 예화 하나.
때는 이조 중엽.
과거를 서울에서 보고 또 성균관이라는 국립대학에서 양반의 자제는 입학하여 수학하는 것이니 운이 좋으면 영.호남 사이에도 죽마고우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동 고을 이선비와 광산고을 김선비가 서로 친하게 된 세월이 건너뛰어서 30년. 소시 적에 성균관에서 수학했으나 두 사람이 다 같이 관운이 없어 그냥 낙향하여 가사를 돌보며 지내는 지주였다.
인생 오십 줄을 넘기니 무상 세월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광산 김선비가 나귀 타고 종 잡혀서 노자 냥이나 짊어지고 경상도 안동 고을 이선비를 찾아갔다. 전라도 광산고을에서 경상도 안동 까지는 자그만치 천리 길이다. 그러나 이 가을에 친구를 만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어 이렇게 찾아간 것이다.
천리 길을 친구 만날 욕심으로 이선비 집을 찾아드니 집안 넓은 마당에는 벼를 거둔 낟가리가 열인지 스물인지 모르게 이곳저곳에 많이 쌓여 있고, 아흔 간도 넘을 대궐 모양을 본 딴 집이 거만하게 버티고 있었다.
김선비는 종놈 돌쇠에게 말하기를
“이 애야! 이집이 크게 보이냐? 우리 집이 크겠냐?”
“아무리 그래도 이집이 우리 집을 따라 오것소. 벗도 못 허제.”
“그도 그럴 것이다. 들을 봐도 호남 땅을 따르지 못할 터이니...”
주종이 그렇게 말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그 댁 종이 나와 묻거늘
“나. 전라도 광산 사는 아무개다. 어서 주인어른께 말씀 여쭈어라!”
이말 전하러 간 종놈 보다 이선비가 버선발로 먼저 뛰어나오며 하는 말
“친구야! 어서 오시게. 어서 와. 야들아 나귀는 외양간으로 데려다 매고...”
말하고는 김선비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사랑채로 들어갔다. 사랑채 안에는 진객들이 여럿 모여서 고준담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 진객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둘은 별채로 들어가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하다가 저녁을 맞았다. 때가 되니 산해진미를 갖추고 처자식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저녁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선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문경지우를 즐겁게 해주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선비는 복이 많아서 아들 오형제에 딸 둘을 두었다. 도성에서 큰일을 보는 둘째와 셋째아들은 없고 큰 아들을 위시한 나머지 지방에서 사는 아들과 손자 그리고 사위까지 다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김선비의 환영회라 그리 모이게 한 것이다.
집 안팎은 여러 대의 촛불을 밝히고 특히 마당에는 횃불도 몇 개 밝혀 두었다. 그러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동쪽에서 얼굴을 내밀자 풍경 소리가 싱그럽다. 복을 비는 기도소리마냥 쉬지 않고 쟁그랑 쨍그랑 울린다.
“친구, 이 잔 받게나.”
이선비가 잘 닦아 금빛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놋쇠 술잔에 천일주를 따라 준다.
“고마우이 친구.”
둘은 주고받고 두어 순배 술이 오갔다. 밥보다 술이 더 맛있는 저녁상이다. 이렇게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다가 주인인 이선비가 갑자기 친구에게 귀에 데고 속삭이듯 말하기를
“자네 재미나는 구경하나 해 볼 텐가?”
“자네에게 이토록 크게 환대를 받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더 재미나는 구경을 바라겠나. 그만 두시게.”
“아니야. 아니라고, 자 우리 둘은 구경이나 하세나.”
이 선비는 그리 말하고 밥상 앞이지만 개의치 않고
“큰 아야! 아비가 구경거리가 필요한데 어찌 생각하느냐?”
“아버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거 말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황소를 지붕 위로 올려 볼래?”
“예, 아버님 어렵지 않습니다. 기다려 보십시오.”
이선비의 큰 아들은 먹든 밥을 그만 두고 일어나 마루로 나가더니 큰 소리로 외치기를
“자 사내들은 다 들어라! 지금부터 우리 집에서 제일 큰 황소 누렁이를 지붕으로 올릴 것이다. 어서 모여라!”
아들의 명에 힘 좋은 종놈들이 십여 명 우르르 몰려 나왔다. 다들 저녁을 먹다 말고 나온 모양이다. 큰 아들은 이들을 지휘하여 벼 낟가리를 뜯어서 처마 끝 마당 아래서부터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낟가리 하나가 거의 없어질 무렵에 기울기가 완만한 계단이 만들어졌다. 그 때 건장한 사내가 황소 누렁이를 몰고 나왔다. 그러자 큰 아들이 소고삐를 손수 잡더니 아버지 이선비와 친구 김선비를 향하여 넙죽 절하고
“아버님, 이제 소가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잘 구경하십시오.”
말하고 ‘이랴 저랴.’ 하며 소를 지붕위로 올렸다. 과연 효자는 소를 지붕위로 올려서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린 것이다.
이 세기의 마지막인 기가 찬 써커스 쇼를 구경한 광산 김선비는 그날 밤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효자 아들을 칭찬했다. 그리고 김선비는 안동의 비경을 두루두루 구경하고 다시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선비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며 전라도를 한 번 찾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선비는 고향집에 돌아와 모든 가족을 불러 앉히고 경상도 안동이 풍정을 다 이야기 했지만 소가 지붕으로 올라간 별난 쇼의 이야기는 숨겨 두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2년 후 그해 가을 노령산 백양사 단풍이 곱게 물들고 담양 대나무가 그 청청함을 멋들어지게 자랑할 무렵 경상도 안동땅 이선비가 장성 부자 김선비를 찾아왔다. 김선비는 안동에서 받은 환대를 곱으로 갚겠다고 벼르던 터라. 아들 형제를 불러놓고 최선을 다해 아비의 체면을 세워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가 지붕으로 올라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지만 효도를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소를 지붕으로 올리는 기똥찬 시험을 내고 싶어서 비밀로 하여 숨겨 두었다.
역시 김선비의 집도 이선비와 같은 조건이나 씀씀이와 형세와 사는 규모가 안동 이선비 보다 여러 곱 더 잘 사는 것이 김선비의 눈에 보이는 형세다. 그러니 무엇이 부족하랴. 다만 아들 형제가 외지에서 벼슬을 사는 고로 아들 사형제 중 둘을 부르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구색 갖추기가 이선비가 하던 것에 비하여 돋보이는 저녁 환영 잔치가 벌어졌다.
광산 김선비는 저녁상을 받고 몇 순배 술잔이 오가고 진짜 금으로 만든 독특한 술잔이 빛나고 있을 때 큰 아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선비가 하든대로 그 시나리오대로 흉내를 내어 ‘소를 지붕으로 올리라.` 고 말했다.
그러자 큰 아들 왈
“아버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암소를 내일 잡아서 마을 어르신을 모시고 동네잔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님! 소를 지붕으로 올리라니요? 이게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버님의 친구 분이 멀리 안동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안타깝게도 아버님께서 실성을 하신 것은 아닙니까? 아버님! 흐흐흑.”
김선비의 큰아들의 말은 현실성이 있는 말이지만 아버지 김선비의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다. 그것은 자신이야말로 아들로 부터 지극한 그리고 귀하디귀한 효도를 받고 산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이선비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비교해 보니 마음 한편이 한없이 무겁다.
그날 밤이 지나고 과연 아들은 암소를 잡아 이선비를 환대하고 마을에 큰 잔치를 베풀어 수많은 소작인들과 함께 그 날을 즐기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양지의 효와 양구체의 효의 차이를 이해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기 전에 우리는 또 만나 볼 사람이 있다. 그는 出天孝子 曾子다. 역사는 증자를 하늘이 낸 효자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 증석에게 다음과 같이 효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그는 몸의 터럭 까지도 다치면 아니 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을 때 까지 그런 행위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의 아버지 증석에게 매 끼니마다 술과 고기를 정성드려 올려 잡수시게 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남은 술과 고기를 누구를 줄 것인가? 아버지 증석께 물었다. 왜냐하면 나누는 기쁨을 아버지께 드리고자 한 일이다. 또한 친구가 찾아와서 고기반찬이나 술이 부족하면 원하는 대로 집에 있는 대로 다 내어 드렸다. 그리하면 아버지 증석은 늘 아들 자랑을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증자가 늙어 아들 증원으로부터 효도를 받을 시간이 도래했다. 이 세상 이치란 속일 수 없는 것 증원은 아버지 증자가 하던 효도를 보고 배운 까닭에 최선을 다해서 바쳤다.
그런데 차이가 있었다. 증원은 마음을 기쁘게 하기보다 몸을 입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이른바 양구체 효다. 광산 김선비의 아들이 아버지께 바친 그 효가 양구체 효다. 증자의 아들 증원의 효와 같은 양구체 효인 것이다.
아무튼 효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우는 것이다. 모범을 보여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孝順은 還生孝順子요 忤逆은 還生忤逆子하나니 不信커든 但看簷頭水하라. 點點滴滴不差移니라.’
이를 새기면 효도하고 순한 사람은 효도하고 순한 자식을 둘 것이요. 오역한 사람은 그 자식이 오역할 것이라. 믿지 못한다면 처마 끝의 낙수를 보라.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물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서는 효도가 증발해 버린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최고 지순한 가치인 효도가 사라졌다. 그것은 핵가족 탓도 있겠으나 젊은이들이 낳아서 길러 준 부모님의 그 깊고도 높은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너무 과잉되게 사랑하다보니 어른에게 효하는 것은 먼 이야기처럼 밀려 나버렸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일찍이 한국의 자족제도를 예찬하면서 ‘지구상에서 최고로 좋은 가족제도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다.’ 라는 말했다.
늙어지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데 그것이 이제 이 나라에서도 점차 사라져 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모두 금전의 문제로 결정되고 만 세상이 되었다. 세계화 세상 세계를 한 지붕으로 삼고 살다보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효의 정신은 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양지의 효든 양구체의 효든 효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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