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명기 황진이의 시조 한 수
황진이(黃眞伊, 1522-1566?)라면 천하 명기(名妓)로 전설적 이름일 뿐 아니라, 우리 문학사를 대표하는 여류 시조 작가로 평가가 높은 인물이다. 용모와 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성질이 고결(高潔하며, 스스로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서화담(徐花潭)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자부했다는 기품 또한 높았다.
신분이 비록 기생이었지만 글공부를 좋아했고, 덕이 있는 선비들과 널리 사귀며 산수 사이에 놀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여성으로 금강산에 올랐다. 죽천 이덕형(竹泉李德泂,1566-1623)이 갑진(甲辰, 1604)년에 암행어사로 송도에 가서 보고 들은 황진이의 명성도 높아 <송도기이(松都記異)>에는 '선녀'이며 '천재'로 칭송했다.
황진이에게 헌사된 이른 칭송에도 불구하고 남아 전하는 문학작품이라고는 시조집 <청구영언>과<해동가요>에 오른 시조 4수와 한시(漢詩) 2수가 고작이다. 그러나 물론 일당백으로 이 시편들이 모두 천추에 빛날 천품(天稟)이어서, 이것만으로 바로 우리 시조사의 한 남상(濫觴)이며, 역사이며 교과서이다.
일찍이 현대 시조의 아버지라 할 가람 이병기(伽藍李秉岐,1891-1968) 선생이 시조 작가로서 자기의 스승은 이름이 좀 길다며, 황진이의 다음 시조 한 수를 두세 번 읊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든가/ 이시라 하드면 가랴마는 제굿하야/ 보내고 가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가람은 스스로 시조 가운데 이 작품 한 수만큼 형식과 기교와 구성을 모두 갖춘 것을 못 보았다고 하고, 그 다음으로 송강 정철(松江鄭徹,1536-1593)에게서는 기개(氣槪)를 보았다고 했다(동아일보, 1938. 1. 29)
실제로 우리 시가의 3대 작가라 할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孤山尹善道)와 노계 박인로(蘆溪朴仁老) 등이 모두 황진이의 뒷시대에 나왔으며, 이들에게서는 황진이의 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뷔 구뷔 펴리라. (황진이)
내 마음 버혀 내어 저 달을 맹글고져/ 구만리 장천(長天)에 번듯이 걸려있어/ 고운 님 계신 곳에다 비취어나 보리라. (정철)
잔 들고 멀리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운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 하노라. (윤선도)
외오 두고두고 그리워하던 그대/ 다만 믿어 오기 고운 그 맘이러니/ 이제야 보는 얼굴도 맘과 다름없구나. (이병기)
황진이 시조의 <님>의 정서만으로도 <고은님>과 <그리던 그대><고은 맘>으로 정송강과 윤고산을 거쳐 가람과 만해(卍海)의 '님'에 이른 우리 시의 심상(心象)의 전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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