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애기봉 전설

難勝 2010. 12. 16. 06:02

 

 

애기봉의 전설

 

유유히 흐르는 조강(祖江)물을 굽어보고 수백 길 높이 솟은 애기봉은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높새바람이 기세가 봄기운에 밀려 활기를 못띠던 때, 기생 애기(愛妓)는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평양감사와의

사랑을 막 피어나는 잔디위에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의 시기인가, 노여움인가, 두 사람의 운명을 모질고 슬프게 만든 변란이 일어났다.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 의 침략과 노략질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했으므로 걸어서 수천리 길을 가야만 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천리를 걸어가야 하는 일이 힘겨운 노릇이었지만 감사를 따르는 애기는 참고 견디며 개풍군까지 왔으나, 감사는 오랑캐들에게 잡혀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 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임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애기는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산정(山頂)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 유언을 전해들은 조강리 마을사람들은 감사에 대한 일편단심과 애달픈 사랑을 가엷이 여겨, 애기를 이 봉우리에 묻어줌으로서 애기의 평생 한을 달래 주었다.

 

그후, 1966년 10월 7일 지금은 작고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을 방문하여 이 봉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애기의 한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우리 1천만 이산가족의 한과도 같다고 하며, 그동안 154고지로 불리던 이 봉우리를 "애기봉"이라고 정식명명하고, 전망대 밖에 친필휘호로써 "애기봉"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비석의 아랫부분에 있는 시는 지금은 작고하신 유명한 시인노산 이은상 선생님께서 이곳을 둘러보고 느낀 감회를 시로서 표현하여 부대에 헌시한 글이다.

 

 

애기봉 전망대

애기봉 전망대는 애기봉 정상(해발 154m)에 위치한 안보교육관으로 좌석은 총 395석이며, 브리핑을 받을 수 있도록 전문 브리핑요원이 상주하고 있다. VTR방영을 위해 멀티비젼과 TV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애기봉 유래와 전방의 북한지역을 설명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방문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1.8km 전방) 북한지역 을 전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북한의 선전마을, 대전차방어벽, 대남방송용 스피커, 흔적선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예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