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무학대사와 왕십리(往十里)

難勝 2011. 6. 3. 05:32

 

 

 

왕십리(往十里)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려서 운다.

   

 

無學大師와 往十里

 

조선 건국 초. 송도 수창궁에서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대사는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 만한 길상지로 구나.』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대사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 적소라고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장,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사는 걸음을 재촉하여 서북쪽으로 10리쯤 걸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로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대사는 그 길로 태조에게 알렸고,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대사,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정도전 일파는 이를 반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대사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일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안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 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사실을 태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결국 북악산(청와대 뒤)을 주산으로 하여 남산을 바라보도록 경복궁이 지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이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 가는구나!』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을 짓게되자, 북악산의 산세가 갈라지고 찢어지는 형상이라 200년 뒤 반드시 이 나라에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며 왕사의 직분을 버리고 산사로 들어가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 설(雪)자와 둘러싼다는 울타리의 울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 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 「왕십리(往十里)」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유래로 왕십리에 속했던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분할됐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명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명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무학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대사의 인연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