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의 주인공 음양지(陰陽紙)
종이에 살고 종이에 죽는 종이는 운명
100년 이어온 '종이 家門'
4대째 음양지 만드는 장지방
인사동 쌈지길에 가게 장지방(張紙房)이 있다. 장씨 집안이 종이 만들어 파는 가게다. 그곳이 9일 길 건너 큰 집으로 이사했다. 경사는 또 있다. 지난 3월 장씨네 좌장 장용훈(77)이 국가 무형문화재 117호 한지장이 된 것이다.
부자? 장씨네는 꿈도 꾸지 않지만 그래도 푸근하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종이를 만드니까. 장용훈과 그 아들들, 성우(43)·진우(42)·갑진(36)은 4대째 내려오는 고집쟁이들이다.
경기도 가평에 터잡고 종이를 만든 세월이 70년이다. 그 아들들 성우와 갑진도 함께 종이를 만든다.
장씨네 한지 제작소는 경기도 가평에 있다. 가평에서 장용훈을 만났다. 장인은 물질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닥섬유가 잘 풀어진 스테인리스 지통 위로 대나무발을 흔든다.
물소리에 귀 기울여 만들어질 종이 두께를 가늠한 뒤 발을 꺼내 뒤집으면 얇게 묻어 있던 닥섬유들이 얇은 종이로 떠진다. 같은 작업을 반복해 반대편으로 뒤집어 내려놓으면 그 얇은 두 장 섬유판이 하나가 된다. 종이다.
음양지(陰陽紙), 얇은 두 종이의 아래위를 엇갈리게 덧대어 만드는 종이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바로 이 종이에 인쇄됐으니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종이는 천년 가고 비단은 오백년 간다.
장용훈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더러 종이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며 '이 종이를 끝까지 지켜라' 그러셔. '이 종이를 꼭 남겨라, 버리지 말고 꼭 지켜라.'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여." 장인이 세월을 이야기했다.
"내가 고생을 할라고 종이에 미쳐갖고, 종이를 딱 만들어서 놓고 보면 참 잘 만들었다 하는 생각이 들어. 종이를 내버렸으면 지금 생활이 나아졌을런지도 몰라. 근데 고생을 할라고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 거여, 아휴."
전주로 피란 갔을 때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늦깎이로 중학교에 갔다. 2년 만에 작파하고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리된 거여. 열장, 백장, 천장 다 고르게 나오면 그게 재밌어. 그렇게 해서 종이에 미쳐서 지금까지 고생하네."
전쟁 뒤 모든 공문서가 복구됐다. 토지대장, 호적은 모두 한지로 제작하던 때였다. 관공서에서 사람이 와서 종이 제작을 맡겼다. 장용훈은 사람 둘 부리며 종이를 떴다. 방구석에 돈 쌓고 살았다. 아버지는 초가집 사고 땅도 샀다. 호시절이었다. 몰락의 전조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주택 개량사업이 시작되면서 창호지와 벽지 수요가 급감했다. 문서는 값싼 기계지로 대체됐다. 닥나무 수확에서 찌고 삶고 말리고 두드리고 뜨고 말리는 데 여러 날이 걸리는 전통 종이는 운명이 빤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공장에 드럼통 몇 개 빼고 몽땅 빚쟁이들이 가져가고 없더라"고 했다. 장용훈은 드럼통 팔아 건진 8000원을 들고 닥 품질 좋기로 유명한 가평 땅으로 이사했다. 1970년이었다.
다른 곳 보지 않고 음양지 기술을 고집했다. 종이 한 장에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시간이 더 걸리고 원가는 솟구쳤다.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1978년 대홍수 때 공장이 물에 잠겼다. 종이며 닥나무들이 몽땅 썩었다.
노인이 그때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때 생각하면, 아이고, 저녁에 자려고 누우면 잠이 안 와. 이튿날부터 종이 말리고 닥 말리고 해서 23일 만에 종이를 떴어. 어휴."
그래도 종이가 좋았다. "땅 한 평, 집 한 채도 못 사서 아이들한테 미안해. 다 내가 종이에 미쳐서…." 장용훈은 물난리를 수습하고서 군유지를 임차해 지금의 공장으로 옮겨 죽어라 종이를 만들었다.
1989년 둘째아들 진우가 아버지 밑으로 들어왔다. 1991년 장남 성우가 합류했다. "5년만 도와드리면 일어설 것 같았다." 성우는 그날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1990년 12월 27일에 말씀드렸다. 돕겠다고. 대신 1주일만 놀겠다고."
1991년 1월 3일 아버지가 아들을 백화점에 데려가 두꺼운 외투를 사줬다. 성우는 그 외투를 2008년까지 입었다. "일주일만 놀겠다고 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 뒤로 하루도 쉰 적이 없었으니까."
9년째 되던 해 크게 혼나고 두 번 "때려치운다"며 집을 나갔지만 아들은 돌아왔다. 이건 피다. 업(業)이요 인연이다. 성우가 말했다. "전통은 기본이다. 그걸 지키되 새로운 요구에 맞는 종이를 개발하는 게 내 할 일이다."
2000년 4형제 중 막내 갑진이 장지방으로 들어왔다. 1998년 일본의 종이예술가 사카모토 나오아키가 장지방을 찾아왔다. 일본에서 사라진 음양지를 물어물어 찾아온 길이었다.
"전주로 원주로 다 더듬어서 왔대. 보더니 나 이거 좀 해주세요 해. 음양지. 이걸 구하러 왔습니다, 그래. 그래서 몇 장 갖고 가고 2000장을 주문했어. 다음핸가, 와서 보고 좋다고 가져갔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져가."
2005년 사카모토는 서울에서 장지방의 음양지로 작품전을 열었다. 장용훈이 말했다. "한국에서 남들이, 장용훈이 종이 기가 막히게 만든다고 다 그래. 돈은 못 벌어. 하지만 후회는 안 해."
후회라니. 아무도 걷지 않은 험한 길 걸어 그리 큰 대로(大路) 만든 분이 후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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