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재미있는 중국의 풍속

難勝 2011. 6. 17. 04:27

 

 

 

재미있는 중국인의 민속 풍속

 

1. 어째서 중국인들은 음력설에 ‘복’(福)자를 붙이는가  

명태조 주원장이 사복을 하고 미행하다가 사람들이 맨발에 수박을 안고 있는 여인 그림을 놓고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마 황후를 모욕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림을 보고 대소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하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집문마다 복(福)자를 붙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점이 많지만 이 복(福)자에는 행복을 희망하는 의미가 보존되어 있다.  

 

2. 어째서 염황자손들은 음력설에 설떡을 즐겨 먹는가  

염황(중국인의 전설적인 조상)의 자손들이 설떡을 즐겨 먹는 것은 기원전 514년 오나라의 오자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제나라와 연합하여 월나라를 대처해야 한다는 오자서의 충고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제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월나라에게 망하게 된 오나라는 성 안에 갇여 굶어 죽어가게 되었다. 그때 오자서의 오랜 부하가 오자서의 유언대로 성 밑을 깊이 파서 찹쌀가루를 쪄 만든 성돌로 기근을 이겨 내겨 하였다. 그 후부터 해마다 음력설이 되면 집집마다 찹쌀가루로 ‘성돌’을 만들어 오자서에게 제물로 올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음력설이 올 때마다 제물을 만들다 보니 ‘설떡’이라고 부르고 또 설에 떡을 먹는 풍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3. 어째서 일부 지역에서 음력 6월 6일날에 시집 간 여자들이 친정집으로 오는가  

춘추시대에 진문공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호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음력 6월 6일은 그의 생일이었는데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날 그에게 생일예물을 보내왔으며 건강장수를 축하하였다. 사람들의 칭찬에 자만하여진 호언은 사돈의 조언을 듣지 않고 오히려 직언을 하는 사돈을 중상모략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의 사위는 인의도덕이 없는 장인을 몹시 증오한 나머지 나라를 위해 해를 제거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몇몇 친구들을 자기 집에 불러다 놓고 6월 6일 호언의 생일날에 호언을 처단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계획을 비밀리에 꾸몄다. 자기 남편의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호언의 딸은 고민을 하다가 몰래 친정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그리고 6월 6일 호언은 생일 연회석상에서 공손하게 딸과 사위를 생일석에 모시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위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6월 6일에 시집 간 딸을 집에 청하는 풍속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서로간에 모여 앉아 근심걱정을 함께 나누고 재난을 막으려는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4. 어째서 음력 8월 15일에 월병을 먹는가  

당나라때 당명황과 법사 나공원은 장안 공중에서 달구경을 하다가 월궁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신선과자를 먹었는데 후에 인간세상에 다시 돌아와 월궁신선과자를 모방하여 만들어 내라고 명령하였다. 이 신선과자는 원래 달나라의 과자였기 때문에 그 모양이 달같이 둥글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월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때로부터 음력 8월 15일 추석날 밤이면 사람들이 월병을 먹으면서 달을 구경하는 풍속이 생겼다. 이 이야기는 물론 기괴하고 황당한 점이 없지 않으나 옛 사람들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추구와 우주에 대한 탐색정신을 굴곡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5. 어째서 어떤 지방에서는 동짓날에 개고기를 먹는가  

진나라 말기의 번쾌는 어려서 개잡이를 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후에 유방을 따라 기의군에 참가하였고 유방을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었다. 어느 해 동짓날에 한고조 유방은 번쾌가 끓인 개고기를 먹었는데 특별히 맛이 좋으므로 먹으면서 연신 칭찬하였다. 황제가 그토록 칭찬하였기 때문에 그 때로부터 민간에서는 동짓날에 개고기를 먹는 풍속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6. 어째서 황혼 때에 신부를 맞이하는 풍속이 생기게 되었는가

중국에서는 황혼이 든 다음 신부를 맞는 습관이 매우 널리 유행되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어두워서 아내를 맞는 것이 예였다.”고 쓰여 있다. 한자에서 ‘혼(婚)’의 본의는 바로 황혼 때의 아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옛날에는 혼(婚)을 또 昏으로 쓰기도 하였다. 무엇 때문에 황혼이 든 다음 신부를 맞이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강제 혼인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황혼이 깃들여 어둡기 때문에 처녀를 납치하기 좋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황혼이 든 다음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족외혼이에서 기원되었다고도 한다. 족외혼인 시기 남자들은 낮에는 본계씨족 집단 내에서 노동하고 밤이 되어야 비로소 아내측 씨족에 가 밤을 새웠는바 늦게 갔다가 일찍 돌아오고 밤이면 만났다가 아침이면 갈라졌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후 남편이 아내쪽에 가 밤을 새우던 습관이 황혼 때 아내를 맞는 습관으로 변화되었다.  

 

7. 어째서 ‘남좌여우’의 습속이 있게 되었는가   

음양학설에 따르면 강한 것, 움직이는 것, 더운 것, 위에 있는 것, 건강한 것, 외향적인 것 등은 양에 속하고 유연한 것, 조용한 것, 차가운 것, 아래에 있는 것, 연약한 것, 내향적인 것 등은 음에 속한다고 한다. 자연계의 태양, 산, 불, 하늘, 좌 등은 양에 속하고 달, 강, 물, 땅, 우 등은 음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회생활 중의 존귀, 남자, 임금, 부친, 남편 등은 양에 속하고 비천, 여자, 신하, 아들, 아내 등은 음에 속하는 것이다. 자연계와 사회에 대한 분류에서 남성, 강인한 것, 왼쪽(좌) 등은 같은 계열에 속하고 여성, 약한 것, 오른쪽(우) 등은 다른 한 계열에 속하므로 ‘남좌여우’ 관념이 형성하게 되었다.

 

8. 어째서 질투를 하면 ‘식초를 먹었다’고 하는가  

당태종 때에 임환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특별히 공을 많이 세웠다. 당태종은 이 공신에게 사의를 표하여 궁녀 2명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아주 위풍이 당당한 대신에게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당태종은 임환의 부인을 궁중으로 불렀다. 당태종은 내시더러 ‘독주’ 한 병을 가져오게 하고 임환의 부인에게 질투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훈계하였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독주’를 가리키면서 만약 부인이 고치겠으면 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지만 고치지 않겠으면 당장에 이 술을 마셔야 된다고 하였다. 원래 성격이 강인한 임부인은 위협해도 굴하지 않고 “이 독주를 마실지언정 남편이 다른 아내를 맞는 것을 동의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고는 그 술을 단숨에 다 마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부인은 ‘독주’를 마셨는데 고통스럽게 아픈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정신이 났다. 원래 당태종이 임부인에게 하사한 술은 독주가 아니라 궁중 안에 오래 저장해 두었던 식초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 사람들은 식초를 질투의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9. 어째서 누룽지탕을 ‘천하제일 요리’라고 하는가

명나라 때 한 재상이 사복을 하고 곤산에 왔다. 그 날따라 날씨가 어찌나 무더운지 갈증도 나고 배도 몹시 고팠는데 마침 당지의 수재인 임자문의 아내 육부인을 만났다. 육부인은 이 사람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말도 속되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집 안으로 모시고 밥 한끼를 대접하였다. 시골 초가집에서 사는 신세라 손님을 대접할 맛나는 음식이 없었다. 육부인은 농촌에서 늘상 먹는 시금치볶음과 콩짜개 두부볶음에 집에서 밥을 하고 가마 밑에 붙었던 누룽지를 기름에 튀긴 다음 신선한 남새국을 그 위에 담아 밥상에 올렸다.

   

산해진미만 맛보던 재상은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누룽지탕’을 보고는 연신 찬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것은 무슨 요리입니까?”하고 물었다. 육부인은 누룽지에 탕을 부어 만든 것을 어찌 요리라 부르겠는가 생각하다가 농담조로 “당신께서 세상에서 처음으로 제가 만든 이런 요리를 맛보셨으니 ‘천하제일 요리’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관청으로 돌아온 재상은 육부인의 집에서 맛본 그 요리맛을 늘 잊지 못해 자기의 관아에서 매일 만들어 먹었고 또 손님이 오면 이것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그 때부터 이 ‘누룽지탕’이 널리 퍼져 관리집들의 연회석에 늘 오르는 명요리가 되었다고 한다.

 

10. 어째서 천진에는 꺼우부리(拘不理) 찐빵이 있는가 

청나라 때 고귀우(高貴友)라고 부르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누가 그를 건드리기만 하면 무서운 사람이 없이 덤벼들었기에 ‘꺼우부리(拘不理, 즉 개도 그를 멀리한다는 말임)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그는 천진의 ’유씨만두점포‘에서 일하게 되었다. 고귀우는 이 점포에서 찐빵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뒤에는 작은 점포를 내게 되었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의 어릴 때 별명이었던 ’꺼우부리‘를 즐겨 불렀으므로 고귀우가 꾸린 찐빵점포는 ’꺼우부리‘가 되어 버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꺼우부리‘ 찐빵이란 이름이 원근에 파다하게 퍼졌고 후세에도 그렇게 전해졌다고 한다.  

 

11. 어째서 광주의 뱀요리 가운데는 ‘룽후떠우(龍虎鬪)’란 요리가 있는가

‘퉁후떠우’란 뱀을 용에 비유하고, 고양이를 뱀에 비유하고, 닭을 봉황에 비유하여 정교하게 만들어 낸 좋은 요리를 가리킨다. 그 형태는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고 범이 뛰노는 듯하며 봉황이 춤추는 듯하여 음식상에 놓으면 마치 귀중한 예술품과 같아서 사람들고 하여금 감히 집어먹기를 주저하게 한다. 이 유명한 요리는 청나라 때 강공은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가 진갑이 되는 해 직접 좋은 요리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맛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무슨 요리를 만들 것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뱀장 속에 있는 몇 마리의 뱀을 지켜보게 되었다. 갑자기 옆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뱀장에 달려들어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 세우면서 위세를 부렸다. 장 속에 있던 뱀도 질세라 대가리를 추켜 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맞섰다. 장을 사이에 두고 하나는 밖에서, 하나는 안에서 막 대결하려는 자세였다. 이를 오래 지켜 보던 강공은 요리사는 그 형상을 본떠 ‘룽후떠우’ 요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12. 어째서 소흥 사람들은 ‘곰팡이 냄새 나는’ 식품을 즐겨 먹는가  

절강성 소흥 사람들은 음식면에서 특이한 기호를 가지고 있는데 ‘곰팡이 냄새 나는’ 식품을 즐겨 먹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지경인 처우떠우프, 처우떠우프간 등이 소흥 사람들에게는 별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음식의 유래는 춘추 전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월나라 왕 구전은 오나라의 인질이 되어 있었다. 오나라 왕의 신임을 얻어 하루빨리 월나라로 되돌아가서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월나라 왕 구전은 오나라 왕의 대변을 맛보는 행동까지 하게 된다.

 

오나라 왕은 구전의 행동을 크게 기뻐하여 그를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주었다. 그러나 구전이 똥을 맛보았다는 이야기가 월나라에 전해지자 신하와 백성들은 너나없이 대성통곡하였다. 왕에게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나라를 지키는 문종대부는 온 나라 사람들 모두가 곰팡이 냄새 나는 음식을 먹을 것과 큰 치욕을 잊지 말고 목숨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릴 것을 제의하였다. 월나라 왕 구전은 나라에 돌아온 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곰팡이 냄새 나는 음식을 먹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몹시 격동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와신상담하여 10년 동안 병력을 모으고 10년 동안 훈련시켜 20년이 지난 후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처럼 곰팡이 냄새 나는 식품을 먹는 것은 월나라 사람들의 뜻과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킨 상징으로 대대로 소흥 사람들의 특유한 음식풍속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13. 어째서 사천성 사람들은 매운 맛을 즐기는가

고대 사천에는 한 빈한한 농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농민의 처는 풍습성 질병과 비위허약 등으로 앓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하게 되고 그 병세는 날로 더해졌다. 남편은 막무가내로 산신을 모신 절당에 찾아가서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에게 3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에 산신령은 크게 감동이 되어 그의 꿈에 나타나 산초와 고추를 부인의 음식으로 할 뿐만 아니라 매일 산초와 고추를 달인 물로 아픈 곳을 찜질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농민은 돌아와 산신령의 가르침대로 하였더니 과연 1개월이 지나 부인의 병이 전부 나았고 입만이 회복되었으며 얼굴색깔도 불그레해졌다. 이 소식이 원근에 퍼져 사천 사람들은 점차 매운 음식을 먹는 습관이 형성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므로 비록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습도가 높고 풍습성 질병이 많은 사천의 기후 조건을 감안할 때 즉 이런 매운 음식이 질병에 이롭게 쓰임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14. 어째서 중국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차를 권하는가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주인은 먼저 차를 손님에게 정중히 권한다. 이는 중국인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습관중의 하나이다.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우선 손님에 대한 주인의 접대와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다. 차는 소화를 돕고 느끼한 것을 제거하며 살균하고 소염하며 소변에 이롭고 해독 역할도 하며 더위를 방지하고 체온을 낮추어 주며 비대함도 감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강에 이로운 차를 손님에게 권하는 것은 주인의 성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우아한 품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차는 비록 하나의 평범한 음료에 지나지 않지만 찻잔이나 물의 사용법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우아한 품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서로간의 깊은 우정을 표시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가까운 친구 사이에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서로를 가깝게 할 뿐만 아니라 흥취도 한결 돋우게 된다. 그러므로 찾아온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우정을 표시하는 하나의 예절로 굳어졌다.

   

15. 어째서 중국인들은 폭죽 터트리기를 즐기는가

폭죽을 터트려 음력설을 경축하는 풍속은 2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당나라 초년에는 재해가 들어 곳곳마다 온역이 돌았고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천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죽통에 초석을 넣어 불을 달아 터트렸는데 초연으로 산등성이의 장기를 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천의 폭죽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폭죽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로 전국 각지에서는 폭죽을 만들어 터트리게 되었는데 특히 음력설을 더욱 다양하고 줄겁게 쇠기 위하여 수많은 폭죽들이 개발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음력설에 대규모적으로 폭죽을 터트려 명절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울 뿐만 아니라 점포가 개업하거나 새집의 집들이에도 폭죽을 터트려 길함을 바란다. 또한 장례식 때에도 폭죽을 터트리는데 이는 귀신과 사악한 것을 쫓는 의미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심정을 전하는 것이다.

   

16. 어째서 물건 사는 것을 가리켜 ‘동서(東西)’를 산다로 부를까  

첫 번째 주장은 주희와 그의 친한 벗 성온여의 대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주희는 시장에 가려고 바구니를 들고 나온 성온여를 만났다. 주희가 무엇하러 가는지 묻자 성온여는 ‘동서’를 사러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희는 우스개로 그를 놀리면서 노형은 무엇 때문에 ‘남북’은 사지 않고 ‘동서’만 삽니까? 라고 말했다. 성온여는 ‘오행’의 학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동방은 목에 속하고 서방은 금에 속합니다. 무릇 금과 목에 속하는 것은 나의 이 바구니에 다 담을 수 있지만 남방은 불에 속하고 북방은 물에 속하므로 물과 불은 이 바구니에 담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북은 사지 않고 동서만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주장은 청나라 때 공위의 <소림필담>에서 고증한 동한 시기설이다. 동한 시기의 큰 장사꾼들과 큰 상점들은 거의 모두가 동경인 낙양과 서경인 장안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물건을 사려면 반드시 동경 아니면 서경으로 가야 했다. 이런 옛 습관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동서라는 말은 물건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7. 어째서 과거에 회관이 있었는가  

회관은 ‘공소’라고도 부르는데 한나라 때 외지에서 온 동향인들의 여인숙을 회관의 처음 형태로 볼 수 있다. 회관이라는 명칭은 명나라에 와서야 사용되었는데 공상업의 발달과 연관이 깊다. 외지에 하나의 향토적인 업종조직을 건립하여 고향 사람들을 단결하고 서로 돕는데 이롭게 하자는 취지로 회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청나라 때에 와서 회관은 더욱 발전하였는데 북경이 수도가 되자 각 지방에서 모두 북경에 회관을 성립할 정도였다. 회관의 역할은이향인을 경계, 방지하며 상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봉건통치자들을 저항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외지에서 곤경에 처한 고향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회관은 지방성이 극히 강하고 동향, 동업종 내부의 이익을 위한 조직으로서 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시대가 발전됨에 따라 점차 없어졌다.

 

18. 어째서 고대에는 황색을 가장 월등한 색깔로 보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중화문화는 황하유역에서 발원되었고 황토고원은 중화민족의 요람이기 때문에 황색이 중국에서 지고무상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고 한다. “흙은 만물을 자라게 하는데 사람에게 이용된다.” “땅은 만물의 바탕으로 모든 생명이 여기에 뿌리내린다.”는 하기의 기록 또한 중국민족의 황색에 대한 애착심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옛사람들은 자연계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목, 화, 토, 금, 수에 근거하여 색깔을 적, 청, 백, 흑, 황 등 다섯가지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서 황색은 토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앙이며 또한 중간이다. 따라서 황색은 가장 각별한 존재가 되어 제왕의 색깔이 되었다는 것이다. 

 

19. 어째서 중국인들은 붉은 색을 상서로움과 경사로움의 상징으로 여길까  

붉은 색은 피나 생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인류가 가장 중요히 여긴 색깔이었다. 원시인들은 자연과 싸우거나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워 피를 흘리고 죽이는 것을 목격하는 가운데서 점차 시체 가운데는 붉은 색 혈액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붉은 색 물질에는 생명력이 숨어 있으므로 이런 붉은 색 액체를 보충하기만 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사람을 파묻을 때 붉은 색 물감을 시체의 밑 그리고 시체 주위에 뿌림으로써 그것이 죽은 사람에게 영양을 보충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원시 문화 가운데서의 붉은 색의 가치와 그것의 상징적 의미는 민족심리 심층에 오랫동안 남아 있어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대대로 붉은 색에 대한 특수한 감정을 지니게 만들었다. 따라서 각종 경축행사에서 붉은 색으로 장식하는 풍속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생일이나 결혼식 때 붉은 것으로 실내를 장식하여 기분을 돋우어 주는 것이 그 단적인 예로 이는 중국인들이 붉은 색을 상서로움과 경사로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