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매년 이때쯤이면 밤꽃이 핀다. 지난주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도 오지 않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이 태어난 터인 백화정(百花亭)에 가서 혼자 반나절 동안이나 놀았다. 선생은 어디 가셨는지 안 계시고 할 일 없는 백수건달 후학(後學)만 여기 혼자 서성거리면서 멀리 보이는 필봉(筆峰)만 탐을 내고 있구나!
백 가지 꽃이 핀다는 백화정의 텃밭 귀퉁이에는 오래된 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밑동이 갈라진 고목의 가지마다 하얀색의 밤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런데 밤꽃의 향기는 맡을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왜 이렇게도 독특하단 말인가! 꽃의 향기라면 당연히 달콤하고 감미로워야 할 텐데, 밤꽃 향기는 비릿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기는 아니다. 흔히 남자의 정액 냄새 같다고도 한다. 치자꽃 향기는 남국의 싱그러우면서도 깔끔한 향이라면, 라일락은 감미롭고도 낭만적인 향기이고, 장미의 향은 청춘남녀의 춘심(春心)을 발동시키는 향기이고, 연꽃의 연향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향기이다. 그러나 라일락보다도, 장미향보다도 더 강하게 와 닿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혼자 된 과부라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밤꽃 향은 과부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하는 향이라고 한다. 강한 양기(陽氣)가 뭉쳐 있는 향이기 때문이다. 양기가 뭉치면 비릿해진다. 단전호흡을 하는 수련가들은 밤꽃 향을 맡으면 하단전으로 기운이 쑥 들어와 축적된다고 한다. 가장 영양가 있는 향이라는 것이다.
단학(丹學)에서는 3가지 보물인 삼보(三寶)를 강조한다. 하단전의 정(精), 중단전의 기(氣), 상단전의 신(神)이 바로 그것이다. 정액을 밖으로 누설하지 않고 축적을 해 놓으면 정(精)이 강화되어 기(氣)가 강해지고, 기가 강해지면 상단전의 신(神)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신이 충만하면 잠을 3~4시간만 자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동의보감'의 앞부분에서는 이 정기신(精氣神) 삼보를 보강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삼보가 충만하면 무병장수할 수밖에 없다. 삼보의 첫 단추는 정을 보강하는 방법인데, 이맘때쯤 그 향기를 진동시키는 밤나무 아래에 1~2시간 앉아서 야릇한 밤꽃 향기를 흠뻑 맡는 것도 전통적인 양생법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조용헌 싸롱>
'사람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두칠성 이야기 (0) | 2011.06.24 |
---|---|
하지(夏至)와 속담 (0) | 2011.06.21 |
재미있는 중국의 풍속 (0) | 2011.06.17 |
난유국향(蘭有國香) - 그릇이 큰 사람의 빈 자리를 생각하며 (0) | 2011.06.15 |
음양지(陰陽紙)를 아십니까? - 장지방(張紙房) 장용훈 이야기 (0) | 2011.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