拈華茶室

선종(선종)의 영향을 받은 중국 차(茶) 문화

難勝 2011. 6. 15. 04:23

 

선종 영향 받은 중국 차 문화

 

차(茶)는 ‘명(茗)’으로도 불린다. 차는 처음에는 약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음료가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서한(西漢) 시대에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을 당시 차는 약물인 동시에 음료로서 중국의 남방에서 이미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출가한 중국 승려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당시 재가(在家)의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차를 약물과 음료로 삼았다.

『여산지(廬山志)』의 기록에 따르면, 동한(東漢)시대에 여산 일대에는 이미 많은 불교사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승려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다고 한다.

차의 계절이 되면 승려들은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야생차를 채취하는 한편 그것을 사원 안이나 사원 주변의 산에 옮겨 심었다. 동진(東晋)시대에 이르면 여산은 이미 중국불교의 중심지가 된다.

『여산지』의 기록에 따르면, 유명한 고승 혜원(慧遠)은 동림사(東林寺)에서 장장 30년을 탁석(卓錫)하며 불법을 홍양(弘揚)하는 한편 승려들을 모아 차를 재배했다. 혜원 자신은 왕왕 “차를 이야기하고 시를 짓고, 인간사를 언급하고 불법을 논하며[話茶吟詩 敍事談經]” 밤을 지샜다고 한다.

 

음차(飮茶)의 풍속이 북방으로 전해짐에 따라 북위(北魏) 때 도성이던 낙양(洛陽)의 한 사찰의 흥쇠를 주된 내용으로 하여 편찬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는 “양지신(楊之愼)이 입에 물을 머금어 진경지(陳慶之)에 뿌리고 ‘고패(줄과 피)를 밥으로 삼고, 차를 음료로 삼는다[菰稗作飯 茗飮作漿]’”고 한 기록이 나온다(권 2, 景寧寺). 또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왕숙(王肅)에게 “양고기가 어찌 생선국만 하겠으며, 차가 어찌 감주(甘酒)만 하겠는가[羊肉何如魚羹 茗飮何如酩漿]”(권 3, 正覺寺)라고 하는 등 차를 마신 기록이 실려 있다.

 

 

선종의 선승들에게 퍼진 차

 

선종이 성행한 당나라에 이르러 차와 불교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선종은 좌선수행(坐禪修行)을 중시하여 승려들에게 좌선을 할 때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집중하여 하나의 경지에 전심함으로써, 심신은 가볍고 편안하며 관조(觀照)는 맑고 깨끗한 상태에 이를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가부좌하여 머리는 바르게 등은 곧게 펴서 몸은 단정히 하고 마음은 비우도록 요구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자세가 기울거나 정신이 흐려져 조는 것, 또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좌선을 하면 필시 피로가 몰려오기 마련이므로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 선종의 승려에게는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음주와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있다. 따라서 정신을 가다듬고 졸음을 쫓으며, 갈증을 해소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데 효능을 지닌 차는 승려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교의와 계율에도 어울리는 이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나라 개원 연간에 태산 영암사에서 항마선사가 선교를 크게 열었다. 참선을 함에 있어서 잠자지 않는 것에 힘을 쏟고 또 저녁 공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은 허용했기 때문에 대중들은 직접 차를 품에 넣어 와 곳곳에서 차를 달여 마셨다. 이것이 전해지고 서로 본떠 마침내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開元中 泰山靈巖寺柳降魔禪師大興禪敎 學禪務於不寐 又不夕食 皆許其飮茶 人自懷挾 到處煮飮 從此轉相埠 遂成風俗].

 

또 『당서(唐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중(大中) 연간(847∼860)에 동도(東都: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에 한 승려가 들어왔는데, 나이가 이미 130살이었다. 선종(宣宗) 황제 이침(李 [)은 그를 만나보고 괴이하게 여겨 무슨 약을 먹었기에 이토록 장수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승려는 “소승은 젊은 시절에도 미천하여 평소 약이라고는 몰랐고 그저 차를 즐겼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종은 그에게 명차 50근을 하사하고 보수사(保壽寺)에 머무르게 하는 한편, 그가 차를 마시는 장소를 ‘다료(茶寮)’라고 일컬었다. 그 뒤 ‘다료’는 빠른 속도로 다른 선사(禪寺)로 퍼져나갔다.

 

 

다료(茶寮)와 다당(茶堂), 다회(茶會)

 

송(宋)나라 이후 선승이 차를 마시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석도원(釋道原)이 저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만 보더라도 음차에 관한 내용이 60번이나 나온다.

그 가운데는 “‘무엇이 승려의 가풍입니까’라고 묻자, 조사가 ‘식후에 차 석 잔을 마신다’고 대답하였다[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飯後三碗茶]”는 구절이 있다. 당시 음차는 선승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승들의 음차 풍속은 차츰 재가의 문인과 학사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다표(茶瓢)를 우스갯소리로 ‘다승(茶僧)’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방악(方岳)의 『다승부서(茶僧賦序)』에는 “임료인은 다표를 일러 ‘다승’이라고 하였다. 나는 다표를 위하여 이 부를 짓는다[林了仁名茶瓢曰茶僧 余爲之賦]”고 하였다.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당·송 시기에 선종 사원의 승려들이 음차를 즐겼던 것만이 아니라 이를 상당히 따졌다는 점이다. 사원에는 앞서 언급한 ‘다료’를 두었을 뿐 아니라 대개 전문적인 ‘다당(茶堂)’을 두었다. 다당은 주지승이 예를 행하는 곳으로 ‘방장(方丈)’으로도 불렸는데, 여기서는 사원의 승려들에게 불법을 강론하고 시주를 모셔서 향차(香茶)를 맛보았다(『象器箋』권 2 참조).

 

사원의 선승들은 새벽마다 일어나 세면을 한 다음 먼저 차를 마시고 나서 예불을 드렸다. 좌향습선(坐香習禪)을 할 때는 향 하나가 완전히 탈 때마다 차를 마셔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일찍부터 규칙으로 자리잡았다.

선사의 의식 규범 가운데는 전문적인 ‘다탕(茶湯)’이라는 것이 있어서,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난 다음 전주(殿主)는 반드시 불전(佛前)·조전(祖前)·영전(靈前)에 공손히 다탕을 올려야만 했다.

 

이 밖에 신임 주지승이 취임할 때도 특별히 정해진 점차(點茶)와 점탕(點湯)의 예법이 있었다. 어떤 사원에서는 명절 때나 성대한 전례가 열릴 때 전문적으로 차를 달여 연회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를 속칭 ‘다회(茶會)’라고 하는데, ‘다탕회(茶湯會)’로도 부른다.

 

‘다탕회’는 나중에 그 범위가 확대되어 사원에서 시주와 참배객을 초대하기도 하였는데, 시주와 신도들이 이를 통해 승려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송나라 때의 『도성기승(都城紀勝)』에 “이 모임은 산사(山寺)에서 재회(齋會)를 하는 경우 왕왕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다탕을 제공하여 불도에 귀의토록 도왔다[此會遇諸山寺院作齋會 則往彼以茶湯助緣 供應會中善人]”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탕회에서는 다례(茶禮)와 탕례(湯禮), 그리고 조사(祖師)의 기일에 다탕을 올릴 때 북을 울려 많은 사람들을 모아 그 장엄함을 내보였다. 이때 사용한 북은 법당의 서북쪽 모퉁이에 걸려 있는 ‘다고(茶鼓)’라는 것으로 이것을 시간 맞춰 두드려 승려들을 소집, 차를 마시도록 했다.

 

아울러 선사 승려들의 직책 가운데는 한 명에서 수 명까지의 전문적인 ‘다두(茶頭)’가 있었다. 그들은 매일 3시에 “찻물을 끓이고 세숫물을 데워 전주(殿主)에게 가져다 드렸다”. 또 아침에는 “공양이 끝나면 차를 달였다[粥罷止靜 燒開靜茶]”. 그리고 “네 자루 향으로 찻물을 끓이고 점심 공양이 끝나면 2시 차를 달였다[四枝香燒開水 午飯罷燒二板茶]”(『佛敎儀式須知』). 어떤 사원에서는 문 앞에 ‘시다승(施茶僧)’을 두어 참배객과 관람객에게 전문적으로 차를 제공하도록 했다.

 

《조주선사와 끽다거》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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