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 현실 세계와 피안의 경계
사찰을 찾아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내에 진입할 때 무심코 다리를 건넜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간 계곡에 터를 잡고 있는 사찰은 물론이거니와 평지에 있는 사찰에서도 불전 구역 초입에 놓인 다리를 자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다리를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편의시설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그 다리들은 배후에 기능적인 가치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보다 먼저 원숭이들이 개울을 건널 때 물 위에 넘어져 있는 나무등걸을 이용하면서 다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계곡이나 작은 하천에 흩어져 있는 널찍한 돌을 발판으로 하여 건너다닌 데에서 실질적인 다리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시작된 다리가 실용성과 기능성을 극대화한 오늘날의 다리로 발전하였고, 현대인들은 그런 다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다리는 일반적인 다리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가 그런 면에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이 다리는 각각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오르는 화강석의 계단 밑에 놓여 있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사람들이 그 위로 다니지 못하게 막아 놓고 있지만, 원래는 자하문(紫霞門)을 거쳐 대웅전에 오르거나 안양문(安養門)을 통과하여 극락전에 들어갈 때 건너던 다리이다.
이들 다리 주변에는 건너야 할 개울물이 흐르고 있거나 장애물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꼭 그곳에 다리가 있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교(橋)"라고 이름한 시설물을 그곳에 만들어 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청운교와 백운교 주면 일대를 살펴보자.
이 다리는 언덕 위의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의 초입에 놓여 있어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다리를 거쳐야 한다. 이 다리를 건너 계단에 오르면 석가모니불이 설법하고 있는 영산회상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 일대의 공간은 그 위쪽에 서 있는 자하문과 함께 더욱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충만되어 있다.
자하문의 자하(紫霞)는 도교에서 신선이 거처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문은 곧 선계에 들어가는 문이되는 셈이다. 또한 청운교의 "청운(靑雲)"은 원래 학덕이 높아 성현의 경지에 오른다는 뜻이고, 백운(白雲)은 백운향(白雲鄕)을 의미하므로, 백운교는 천재(天宰)가 사는 곳에 가기 위한 통로가 된다. 그래서 청운교와 백운교는 선계(仙界), 즉 부처님이 계시는 영산회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는 선경(仙境)의 다리요, 환상의 무지개다리(홍교)인 셈이다. 한편 연화교와 칠보교의 다리 위에 걸쳐 있는 계단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그 위쪽에 안양문이 있다. 다리 이름을 연화교라고 한 것은 서방 정토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태어난다는 연화 화생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연화교를 건넌다는 것은 곧 극락세계로 진입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불전 영역을 이상화하려는 의지와 선계에의 동경심이 반영된 다리의 이름을 불국사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다른 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순창 송광사 삼청교와 승주 선암사 승선교, 여천 흥국사 홍교, 고성 건봉사 능파교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 피안교(彼岸橋)와 극락교(極樂橋), 능허교 등의 이름을 가진 다리도 많다. 이 다리들은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단순한 편의시설의 차원을 넘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다리의 이름들을 살펴볼 때 피안이란 도피안(渡彼岸)에서 따온 말로 생사번뇌로 가득 찬 속세를 떠나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것을 뜻한다. <금강경>에서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뗏목을 타고 저편 강기슭에 다다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따라서 다리 이름을 피안교라 함으로써, 이 다리를 생사의 세계인 차안에서 열반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가는 뗏목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극락교는 극락으로 진입하는 다리를 뜻하고, 연화교는 연화 화생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삼청교의 삼청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세 궁을 의미하는데 옥청, 상청, 태청의 삼청을 가리킨다. 능파는 성현이나 신선의 걸음이 우아하고 가벼움을 형용한 말이고, 능허란 하늘 또는 하늘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리의 이름들은 모두 도교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찰 초입의 다리에 붙여진 이름에는 불교적인 의미와 도교적인 의미가 혼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안, 극락, 연화, 칠보 등은 불교와 직접 관련된 이름이고 삼청, 승선, 능파, 능허, 청눈, 백운 등은 도교적인 색채가 짙은 이름이다. 도교에서는 이상 세계를 선계라 하고, 불교에서는 불국정토 또는 극락세계라고 하여 서로 다르게 부르지만, 도교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로 상통한다. 실제로 도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대일(大一)의 인식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 길에는 하나에 대한 다른 하나의 상위라든가, 그 둘 사이의 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완벽한 균형에 의한 이원론자체의 소멸을 뜻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불이(不二)의 개념과 상통한다. 이것이 도교적 색채를 띤 용어들이 사찰의 다리 이름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듯 사찰의 다리는 기능적인 효용성과 함께 사찰 경역(境域)을 이상화하려는 의지와 불국세계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또한 현실세계와 피안정토의 경계이자, 두 영역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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