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기에 따르면 기림사는 신라 선덕왕 12년(643) 창건되었다고 한다. 기림사라고 불리기 전에는 임정사로 불렸는데 이 절에는 광유선사가 머물고 있었고 이 임정사가 선덕왕 12년 원효대사에 의해 기림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함월산 기림사는 동해에서 신라 경주에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데 과거 이 길을 통해서 석탈해가 경주에 들어가 탈해왕이 되기도 하였다.
기림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광유선사와 관련된 설화에 의하면 그는 신라승려가 아닌 외국승려 곧 인도승려로 여겨지는데 그렇게 된 원인은 기림사의 지정학적 위치와 기림사가 인도의 기원정사에서 절 이름을 따온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광유선사와 원효대사가 기림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언급은 후대에 덧붙여 진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의 경우 그가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이 648년으로 선덕왕 12년 당시에는 절 이름을 바꿀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기림사에 관해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681~692)이 신라 삼보 중 하나인 만파식적을 감은사 앞 바다에서 얻어서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쉬었는데 이 때 용에게 받은 옥대의 고리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바람에 용이 날아간 자리에 용연(龍淵)이 생겼다고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동해의 해중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세운 절로 이 절 동해에서 외적을 물리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만파식적을 얻었고 기림사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데서 이 곳 기림사가 감은사와 더불어 동해바다를 지키는 호국사찰로 기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기림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고려 후기에 가서야 다시 나타난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조에 의하면 기림사 주지 각유(覺猷)가 몽고 침략 때 의상대사 이래로 낙산사에서 보관해오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궁중에 보관할 것을 건의하고 있고, <전후소장사리>조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치아를 몽고 침락시 강화로 수도를 옮길 때 잃어버렸는데 이를 다시 찾아 전각에 모셨다는 사건의 전말을 대선사 각유가 그대로 적어 두었다고 한다.
각유는 궁중의 보물들에 대한 소재를 잘 파악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가 맡았던 대선사라는 직책은 고려시대 선종계통의 가장 높은 계위였고 일연이 노숙이라고 존칭을 붙인데서 당시 그의 위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각유가 기림사의 주지를 맡았다는 점에서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기림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좌의 묵서명에 연산군 7년(1501) 조성이란 글귀가 있는 건칠보살좌상의 조상양식이 원나라 계열로 보이는 점도 고려후기 기림사의 성세와 견주어 있을 법한 일로 보인다.
숭유억불정책하의 조선에서 기림사는 세종대(1418~1450) 해인사, 단속사, 견암사와 더불어 경상도의 4대사찰로 130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7년이 조성의 건칠보상좌상 좌대에서 기림사가 여전히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신라 때의 호국사찰의 성격을 이어받아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적광전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은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986년 이 불상의 복장에서 고려시대 사경을 비롯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이 유물들은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현재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후 기림사는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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