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제2회 포교사고시 문제해설(4)

難勝 2008. 11. 4. 06:44

七佛-19 제2회 포교사 문제(7~8번) 해설입니다. (일부 잘못된 해설은 질문 바랍니다.)

7. 사성제에 대한 설명과 관계 없는 것은? 

 ①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준다.

 ② 고, 집, 멸, 도를 말한다.

 ③ 사성제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대비하고 있다.

④ 사성제에서 집(集)성제가 팔정도와 관계가 깊다.


팔정도는 苦에서 벗어나는 수행방법이기에 멸성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다음의 8번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한꺼번에 해설문 붙입니다.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상,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번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먼저 이 팔정도의 각 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 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이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 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8. 다음 중 팔정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정명(正命) - 바른 생활      ② 정정(正定) - 바른 사유

 ③ 정견(正見) - 바른 견해      ④ 정정진(正精進) - 깨달음을 향한 바른 노력


정정은 바른 수행을 의미하며 바른 사유는 정사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