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제3회 포교사고시 문제해설(8)

難勝 2008. 12. 3. 03:41

11.  불교의 업설(業說)에 관한 설명 중 가장 바른 것은?

 ① 권선징악을 위한 통속적인 교화방편설이다.     

 ② 일종의 숙명론으로서 체념과 달관을 강조한다.

③ 선의지(善意志)에 바탕한 창조적 노력을 강조한다.

 ④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은 육도(六道)윤회설과 무관하다.



업설


앞서 불교의 연기 사상을 소개하는 곳에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작용,반응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보았다.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러한 인과율에 입각한 실천 윤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업(業, karma)이라는 술어는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 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 두 술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업과 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이 선(善)이면 과보도 선, 악(惡)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업(黑業)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에는 보(報)가 없다."<중아함 권 27 達梵行經> 불흑불백의 업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 그러냐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와 같이 선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 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선업보다는 악업을 익혀 왔음이 사실이다.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아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痴暗) 일인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선보다 악을 행하기가 더 쉬워 일단 악에 빠지면 끝없는 악의 순환이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악업을 타파하는 일에서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먼저 악업부터 설명하고 계신다. "몸으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를 받나니, 그것은 곧 살생, 투도(偸盜),사음이다. 입(言語)으로 네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 받나니, 그것은 곧 망어(妄語, 거짓말),양설(兩舌, 두말), 악구(惡口, 욕지거리) ,기어(綺語, 꾸밈말)이다. 의지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나니, 그것은 곧 탐욕(貪欲, 욕심),진에(성냄),치암(痴暗, 어리석음)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상 열 가지를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하는데,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十善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십선업은 따로 시설하지 않고 십악업에 부정 접두사 '불(不, a)'을 덧붙여 이를 표현함이 보통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불살생(不殺生),불토도(不偸盜),불사음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업은 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이고,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무탐(無貪),무에, 정견(正見, 無痴)이다.<잡아함 권28> 십선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가령 불살생은 방생으로, 불투도는 보시로.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으로 짓는 삼업(三業)과 입으로 짓는 사업(四業)과 의지로 짓는 삼업 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파가 신벌(身罰)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보는 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의업(意業)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본다.<중아함 권 32 優婆離經> 어던 경우에는 의업을 사업(思業, cetana-karma)이라 하고 구업(口業), 신업(身業)을 사이업(思已業, cetayitva-karma)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의업의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선,악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상과 같거니와,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엿볼 수가 있다. 윤리학에서는 선악의 판별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불교의 업설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십업의 내용을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선악의 판단은 각자의 의지에 맡겨져 있지만,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회적 책임(報)이 또한 깊이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매우 합리적인 사회윤리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실제적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문제성을 던져 줄 때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과 율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구체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극악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잘 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일만 하는데도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 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십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문제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업보의 인과율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의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원리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유신론자는 신의 뜻에서, 운명론자는 운명에서, 우연론자는 우연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쉬우므로 곧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크게 행해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명들은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는 인간의 업인에 의한 것과 그렇게 않은 원인(신, 운명, 우연)에 의한 것과의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이 한 일이며 해야할 일인가가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성에서 만일 모든 현상이 신이나 운명, 우연 등의 원인에서 오고 있다고 하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욕심, 노력 등이 있는, 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수긍할만하게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중아함권 3 度經>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냉철한 현실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업보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십이처설에서 분명히 다졌던 바와 같이 "일체 존재(현상)는 십이처에 들어가고, 그 이외의 경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불교의 업설은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로 전개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1.현재 업인이 있는데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와, 2.과보는 있는데 그 업인이 현재 발견되지 않을 경우의 둘로 갈라진다. 이러한 두 경우를 업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1의 경우는 그 과보가 현세의 이후에 즉 내세(來世)에 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2의 경우는 그 업인이 현세의 이전에 즉 숙세(宿世)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중아함 권 3 思經>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삼세업보설로 전개되므로, 사후 내세에 가서 받을 업보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육도의 도(道, gati)는 '취(趣)'라고도 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가리킨다. 그런 취로서 천(天),인(人),수라(修羅),아귀(餓鬼),축생,지옥의 여섯 가지를 시설(施設)한 것을 육도라고 한다. 아수라를 빼고 오취를 헤아릴 경우도 있다. 육도에서 앞의 셋을 선업에 대한 선취(善趣)라 하고, 뒤의 셋을 악업에 대한 악취(惡趣)라고 한다.


(2) 업설의 평가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의 삼세업보, 육도윤회설의 대강인데, 이것은 실천적 인간의 시야를 현세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하한 시공 속에 펼치게 하며,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는 강력한 의지적 인간상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설은 종래 학계에서 올바른 이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진정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일도 있다.


업설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 평가 중에 첫째로서 우리는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보려는 견해를 들 수가 있다. 업설은 현세의 괴로움을 숙세의 인연으로 돌리고 체념하라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현재 받고 있는 괴로움이 숙세의 업인에 의한 것도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교 업설의 목적은 그것을 체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에 목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방편설(敎化方便說)'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업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업설뿐만 아니라 무아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가 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교의 무아설은 앞서 십이 연기설의 중도설(中道說)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명 망념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그것까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본다는데(십이처설), 이런 입장과 삼세업보설은 모순되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숙세나 내세와 같은 것은 보통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교 교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께선 각 종교의 진리성 주장에 대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현실 세계의 관찰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로 시종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삼세업보설은 권위주의적 입장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인과를 관찰하면 누구나 그 필연성을 추단(推斷)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업설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소산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업보의 실상(實相)이 직접 인식되는 숙명통(宿命通)이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지혜도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삼세업보설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임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부터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계율은 업설에 입각한 것이며, 과거 칠불(七佛) 또한 모두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 七佛通戒偈)을 읊고 계신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하며 그 의지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석가모니께선 당시 인도사회의 사성제도(四姓制度)를 비판하고 배격하신 것도 업설의 정신에 의했던 것이다. 사성은 모두 선,악업에 의해 상벌이 결정되는 것이니,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성(種姓)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20>


바라문교의 공희(供犧, 邪盛大會)에 대해서도 수백 마리의 소와 양 등을 살상하는 것은 반대하셨으니, 이것 역시 업설의 불살생에 의한 것이다.<잡아함 권 4>


불교 업설의 사회 윤리적 성격은 오늘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 등이 민주시민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는데, 업설에서의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報)는 그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 또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관은 현실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이라고 보겠는데, 업설의 정신은 바로 그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