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음 중 부처님을 칭송하는 여래 십호에 들지 않는 것은?
① 명행족 ② 구담 ③ 응공 ④ 정변지
중생의 ‘본심’인 ‘깨달음’에 갖추어진 열 가지 공덕상(功德相)
1. 여래(如來)
여(如)가 옴을 느끼는 공덕
즉 감각의 앞에는 실체가 없는 허공뿐이나 그 허공에서 자신과 산하대지가 나타나게 되는 심법
꿈이 드러나듯이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세계가 무시이래로 드러나게 되는 법칙이 본심에는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세계가 자기 이전에 본래 있었던 것으로 깨닫게 된다.
2. 응공(應供)
바라봄으로서 공양되는 공덕
즉 여가 드러나게 되면 그로 하여금 차선에 자기라는 것이 양육 되는 심법
대상으로서 지어진 기억이 없으면 자기가 없게 된다. 그러니 찰나에 사라진 대상이 멸도 되어 기억을 이루면 그 기억이 허망한 ‘나’를 이루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자기의 실체가 있기에 대상을 보게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항상 대상을 먼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대상이 사라지면 자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세상이 보이면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3.정변지(正徧知)
온 누리를 그대로 아는 공덕
즉 시방(十方)을 모두 느껴서 유무와 대소, 강약, 방향 등을 아는 심법
허공은 트이고 벽은 막혔다고 알며, 막히면 있다고 알고 트이면 없다고 알며, 있는 것은 크고 작음을 알고, 강하고 약함을 알고, 이쪽과 저쪽을 아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의 감각에 들어있는 것을 아는 것이니 세상이 곧 감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모를 것이 없으나 대상이 실제로 감각의 밖에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중생은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게 된다. 색깔은 망막에 있고 소리는 고막에 있으며 냄새는 코 속에 있고 맛은 혀에 있으며 감촉은 몸에 있고 뜻은 심정 속에 있으니 온 세상이 육근 안에 존재하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4. 명행족(明行足)
마주함에 의하여 행이 갖추어지는 공덕
즉 상즉(相卽)에 의하여 드러나게 되는 현식으로 취사의 의지를 갖는 심법
실체가 없는 육진과 육근이 만나 이름인 육식을 이루면 이로 하여금 추구심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행이 되는 것이니 모두가 꿈과 같으나 식속에 들어있는 이름을 이름인줄 모르는 중생은 자기 속의 환상을 좆아 의지를 일으키게 되기에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러 끊임없이 어둠을 향하여 수고로운 여행 즉 윤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5. 선서(善逝)
기쁨을 향해가는 공덕
즉 행을 함에 있어 항상 좋은 것을 향하는 심법
일체세계는 오직 마음하나로 지어지는 꿈이므로 죽는 다는 것도 생각을 빼고 나면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시체에게는 죽었다는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살아있다고 하는 자에게는 죽었다는 생각이 더욱 있을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색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으로서 구할 수가 없기에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오직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이란 생사를 초월한 정신작용이므로 역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직 생각이라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삶이라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예외 없이 꿈인 것이고 이 꿈은 단지 즐거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니 슬프고 두렵고 조급한 생을 살게 되는 부처의 자식을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6. 세간해(世間解)
과거와 미래의 찰나적 중간을 이해하는 공덕
즉 의지를 행하되 지나간 상황을 기억하고 다가올 상황을 짐작함으로서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심법
지나간 기억은 생사가 없는 것이고 물질도 아니며 되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근거로 찰나적인 지금을 해석하고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니 과거가 허망한 기억이라면 그 기억의 맨 끝인 ‘지금’... 즉 머리카락의 끝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끝을 정할 수가 없고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의 맨 끝은 기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할 수가 없는 ‘지금’이니 기억이 허망하다면 지금도 허망한 것이고 이러한 지금으로 상상하는 미래란 더욱 허망한 것이므로 모두가 환상과 같은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중생은 현실이 존재한다고 믿어 모든 것에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탐, 진, 치를 일으켜 악의 길로 들게 되는 것이다.
7. 무상사(無上士)
자타에 있어 자기를 존중하는 공덕
즉 현재를 이해함에 있어 자기를 제외하면 일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을 알아 항상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심법
십팔계가 곧 세계이고 육진은 몸, 육근은 감각, 육식은 심정을 이루니 모두 ‘나’를 이루는 요소이므로 세계가 곧 ‘나’인 것이다. 자기보다 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위치를 잊는다면 이 세상은 당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팔계를 셋으로 따로 놓고 각각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는 사라져도 세계는 남는 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이다. 자기의 세계는 자기만 느끼던 것이니 자기가 떠날 때는 그 세계도 기억으로 가지고 간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세계를 여기서 가지고 가야 극락으로 가게 되는 것이며 여기가 죽고 사는 곳이라고 기억해서 그 세계를 가지고 가면 당연히 죽고 사는 곳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8. 조어장부(調御丈夫)
자타에 있어 남을 기쁨으로 이끄는 공덕
즉 모두가 자기로서 존재하기에 각각에게 기준이 있으나 자기의 상황은 자기만이 실감나는 상황이므로 남의 행을 이해하기 이전에 자기의 상황으로 남을 이끄는 심법
꿈은 자기만이 느끼는 것이다. 역시 꿈을 꾸는 법칙으로 드러난 이 세계도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세계를 자기만 느끼는 것이다. 자기에게 시끄러운 소리가 남에게는 음악소리로 들리는 것은 육진이 드러나는 하나의 허공을 공통으로 바라보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세계는 자기만이 홀로 갖는 꿈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같이 꿈을 꾸어도 절대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것이다. 남의 꿈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자기의 꿈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세상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남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중생은 자기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죽고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삶에 애착을 갖게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여 가장 힘든 현실을 맞이하게 한다. 그러나 이 법칙도 자기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는 부처의 자비와 다른 공덕은 아닌 것이다.
9. 천인사(天人師)
스스로는 마음으로 남은 사람으로서 대하여 가르치는 공덕
즉 남을 사람으로 보는 것은 정신이니 자기는 정신이고 남은 사람이 되어 상대하는 심법
남의 몸을 보는 것은 눈이지만 눈은 색이 없기에 남이라는 몸의 색을 보는 것이다. 귀에도 소리가 없기에 남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남이 있다고 느끼는 자기는 감각하는 주체 즉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마음이니 하늘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모르게 남의 심정을 헤아려주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을 남으로 보고 있는 동안 그 남의 몸이 내 기억으로 들어와 어느새 나도 몸이 되어버린 중생은 스스로가 하늘 사람으로 이루어진 스승임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10. 불세존(佛世尊)
세계의 주인인 부처의 공덕
즉 스스로의 깨달음대로 최선의 세계에 주인공으로 존재하게 되는 심법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가지고 노는 것이므로 언제나 주인이 스스로인 것이다.
남이 보인다 해도 사실은 자기가 이루어내는 육진으로 보는 것이고 실제의 남은 허공과 같은 마음인 것이다. 역시 상대자도 같은 법칙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일체 중생을 만들어 가진 것은 자기 스스로인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다. 이것이 곧 부처의 능력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모르기에 중생이 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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