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대사 폄하는 역사왜곡이자 날조에 불과
(돈황본 육조법보단경)
신시보리수 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 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 時時勤拂拭
물사야진애 勿使惹塵埃
이 몸은 보리수(깨달음의 나무)이고
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
신수대사가 5조 홍인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계를 읊어 보인 이 示法詩(시법시)는 훌륭한 오도송이다. 오언절구의 근체시로써 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인 문학성과 대구(對句), 平仄(평측) 그리고 押韻(압운)의 운율이 아주 잘 되어 있고, 심오한 禪理(선리)와 哲理(철리)를 담은 중국 시가 중 賦(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각각 깨달음의 나무와 밝은 거울에 비유한 것이 적절하고, 1구와 2구에서 몸[身〕과 마음〔心〕, 보리수와 명경대가 대구를 이룬 것이 훌륭하다. 명경(明鏡)이 자성불성을 상징하고, 진애(塵埃)가 삼독번뇌를 상징하는 것도 뛰어난 발상이다. 대(臺)와 애(埃)로 압운한 것도 완벽하다.
뿐만 아니라 1․2구에서 “우리의 본래마음이 청정한 것을 맑은 거울과 같음을 밝히고(마음의 원리)”, 3‧4구에서 “본래마음은 청정하나 삼독번뇌의 먹구름이 가려서 불광을 발휘할 수 없음으로 시시때때로 오염되지 않도록 털고 닦는 수행을 하여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자(마음의 수행)”고 균형 있게 읊고 있다. 체용동시(體用同時)이다.
신수대사의 오도송은 깨달음의 경지를 읊은 선리(禪理)로 보나 시로써 문학성 즉, 시격(詩格)으로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명품 선시이다.
그러나 《육조법보단경》에서는 신수대사의 이 게송을 무상게(無相偈)라고 칭하고 있는데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라는 내용이 점수선(漸修禪)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우리의 본래마음(본래심, 자성, 불성)이 부처의 덕상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고, 청정한데 무엇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근기가 낮은 신수 북종선에서 수행의 단계와 계단을 밟아서 점차적으로 닦아가는 점수선이라고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수승한 돈오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육조법보단경》은 신회(神會)가 자신이 7대조사가 되기 위해 이미 황제(국가)로부터 6조로 인정을 받은 신수대사(7조는 그의 제자 보적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고 비판하여 혜능대사를 6대조사로 현창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돈황본 《육조법보단경》에는 신회가 7조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후에 편찬된 《육조단경》에는 신회가 덜 떨어진 지해(知解)종도가 되어 6조의 서자가 되고, 남악 회양이 7조가 되어 있다. 이것은 날조이다. 단두대를 만든 사람이 단두대에 목이 잘린 격이 되었다.
신수대사의 저서인 돈황출토 문헌 《관심론》, 《대승무생방편문》에는 돈오선 사상이 나타나 있다. 또한 남종선에서도 점오선(漸悟禪), 점수선이 나타나 있다.
1900년 중국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중국초기 선종사와 선어록이 포함되었다. 이 고문헌에 의해 중국 초기선종사와 선사상이 다시 쓰여지게 되었고,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의 연구에 의해 신수와 신회가 중국 초기선종사의 선구자로서 초기 선 사상의 기초를 만든 위대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는 아직도 《육조단경》에 나타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신수가) 완전히 깨닫지 못한 덜 떨어진 선사로 인식되어 있다. 원균(元均)이 임진왜란 때 수많은 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고, 전쟁이 끝나서 나라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되는 공훈을 세우고도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한 역적으로 오인 받고 있다. 이은상이 《이순신전》을 써서 한국의 영웅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극적으로 더욱 훌륭하게 만들려다가 멀쩡한 사람 원균을 천하에 못된 역적으로 만든 것이다.
신수대사가 30년도 더 아래인 손자뻘 되는 혜능대사와의 법통싸움으로 개가 된 것이 원균과 같다 하겠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요 날조이다. 신수대사는 코페르니쿠스적 심판의 피해자이다. 마땅히 복권시켜야 한다. 신수의 시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감상해야 한다.
신수대사(606-706)는 50세에 5조 홍인대사를 만났고, 90세가 되어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입궁하여 황제가 먼저 예를 올리는 여불(如佛) 대접을 받았다. 삼제(三帝)국사요 양경(兩京)법주로서 전무후무한 예경을 받아서 제도(帝都)불교를 교화하였다. 초기 선종이 형성되고, 선사상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최초로 선과 시가 만나서 융합된 것은 《육조법보단경》에 나오는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오도송에서 전형적인 선시의 모델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가 최초로 마음을 깨달아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선법을 전하여 불교의 종파로써 선종(禪宗)이 형성된 것이 당나라 초기에 신수와 혜능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두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마음의 경계를 시격(詩格)을 갖춘 게송으로 읊은 것이 선과 시의 만남으로 선시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에 선이 남북조시대 달마대사(?-528) 이전에도 전해져서 수많은 선사들이 참선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양(梁)나라 혜교(慧皎, 495-554)가 찬술한 《고승전》과 당(唐)나라 도선(道宣, 596-667)이 찬술한 《속고승전》습선편(習禪篇)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달마대사 이전에는 선 수행자들이 집단을 이루어서 일관된 선 이론이나 소의경전을 가지고 수행하지 않았음으로 선종이란 종파가 형성되지 않았다.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오도송을 선시의 시초로 규정한 것은 선시의 범위가 경전에 나타나 있는 선적인 게송이나 인도의 시까지 확대되는 것이 저어하여 필자가 규정해 본 것이다.
<문학박사 김형중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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