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24절후의 하나.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기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였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어 끓인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이다.
동짓날에 궁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백강(白薑)·정향(丁香)·계심(桂心)·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호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御璽;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파란 표지의 달력을 선사하였다.
동짓날은 부흥을 뜻하는데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이다.
동짓날부적으로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또 동짓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불교에서 동지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귀한 날로 여기고 있으나 언제부터 그래왔는 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 총림(叢林)<대중 스님들이 모여 사는 선원>에서는 동재라 하여 절의 주지스님이나 일반신도가 시주가 되어 동짓날에 대중을 위하여 베푸는 재회를 봉행(奉行)하였습니다.
총림의 4절은 <결하(結夏); 여름결제> <해하((解夏); 여름해제> <동지> <연조>를 말하며, 그 중 동지를 동년이라 하여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왔으며, 동지의 전야를 동야(冬夜)라 하여 성대하게 치뤄왔습니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바로 이 동지의 전야를 동야라 하는 풍습에서 전해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동지에 얽힌 불교설화
1) 선덕여왕과 지귀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서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합니다.
어느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가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날이었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끊어올라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니, 신라의 방방 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의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2) 팥죽과 나한님
동짓날에 절에서는 팥죽을 쑤어 대웅전이며 나한전 등에 공양을 올리고 온 대중이 팥죽으로 공양을 하며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사라는 절의 공양주 보살은 그만 동짓날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잠만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스님의 호령 소리에 겨우 기지개를 펴고 나오던 공양주 보살은,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늦잠을 잔 덕분에 아궁이의 불씨마저 꺼져 버리고 회색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인지라 불씨가 다 사그라들고 없어져버리면 불씨를 다시 얻어 오기 전에는 부엌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요.
부처님께 죄송한 마음은 둘째 치고 당장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만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다 못한 공양주 보살은 절 아래 동네의 김서방네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려고 부리나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날 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 김서방네 집은 천리 만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김서방네 집에 도착한 공양주 보살은 큰 소리로 김서방을 불러 자초지종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김서방은,
"아까 행자님이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불이 또 꺼졌나요?"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행자님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행자님이 없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조금 전에 어떤 행자님이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시면서 팥죽까지 한 그릇 드시고 불씨도 얻어가셨는데요"
마하사에는 행자 스님이라곤 없었으니, 공양주 보살은 마치 귀신에 흘린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마음에 불씨를 빌려 가까스로 절에 도착했으나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부엌의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주 보살은 급히 서둘러 팥죽을 쑤어 먼저 법당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 나한전으로 팥죽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한님께 팥죽을 올리던 공양주 보살은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공양주를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고 계시는 나한님의 입가에 붉은 팥죽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고, 나한님. 잘못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대로 엎드려 크게 절을 올렸습니다.
김서방네 집에서 팥죽을 얻어 드시고 불씨를 얻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행자는 바로 그 나한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절에나 나한전에 모신 나한님은 모두가 미소를 머금고 계시고 그 입술은 한결같이 붉은 색인데, 이는 바로 동짓날 드신 그 팥죽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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